프리드리히 니체

"신은 죽었다", "나를 죽이지 못하면 나를 강하게 만들 뿐이다"

본명 : 프리드리히 빌헬름 니체 (Friedrich Wilhelm Nietzsche)
출생 : 1844년 10월 15일. 독일 연방 작센 주 뢰켄.
사망 : 1900년 8월 25일 (향년 55세)
국적 : 프로이센 왕국 (1844~1869), 무국적 (1869~1900)
직업 : 문헌학자, 철학자, 시인, 음악가

독일 출신의 철학자, 문헌학자. 그가 주장한 주요 철학적 사상에는 신은 죽었다, 힘에의 의지, 위버멘쉬, 영원 회귀, 운명을 사랑하라 등이 있다.

특유의 급진적인 사상으로 생철학, 실존주의, 포스트모더니즘 등의 철학에 가장 많은 영향을 미쳤으며, 현대 대륙 철학의 근간을 마련했다. 마르크스, 프로이트, 비트겐슈타인과 더불어 현대 인문학 전반에 가장 큰 영향을 끼친 철학자이기도 하다. 실제로 저명한 사회학자 막스 베버는 이 시대 지식인들이 얼마나 정직한지를 확인하려면 그들이 마르크스와 니체의 이론적 기여를 어떻게 평가하는지를 보라고 주장하기도 했다. 쉽게 말해, 마르크스와 니체의 영향력을 인정하지 않는 학자는 진실되지 못하다는 말로, 니체가 당대에 끼친 지성사적 영향력을 높이 평가한 발언이었다.

특유의 공격적 비판으로 인해 오인되기도 하지만, 어떤 철학자보다 넓은 사상의 스펙트럼을 가지고 있는 철학자이며 그의 저서는 보는 사람의 시각에 따라 극단적일 정도로 다양하게 해석되고 있다. 그러한 까닭 중 하나는 니체 특유의 서술 방식이다. 그의 저작은 대부분 압축적이고 강렬한 아포리즘으로 이루어지며 논리적이라기보다는 문학적이라는 인상을 강하게 남긴다. 하지만 실제 성격은 온화하고 유머를 좋아했으며 사교성이 있었다고 한다.

1893년 유럽을 휩쓴 아방가르드의 열기로 니체의 책은 엄청난 주목을 받게 된다. 니체를 소개하는 강연과 저술은 큰 흥행을 이뤘으며, 이를 통해 니체의 이름이 순식간에 유럽 전역으로 퍼졌다. 그의 영향을 받아 화가 에드바르트 뭉크는 '절규'라는 작품을 탄생시켰다. 1896년에는 리하르트 슈트라우스가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를 교향시로 만들어 공연하기까지 했다. 하지만 이때의 니체는 광증에 완전히 지배당하고 있었기 때문에 자신의 유명세를 알지 못했다. 약삭빠른 여동생 엘리자베스는 오빠의 책에 쏟아지는 국제적 관심을 이용하여 자신의 이익을 챙기기 위한 계획을 세웠다. 집에다가 '니체 문서 보관소'를 짓는 것이었다. 2층에는 광증에 빠진 오빠 니체를 둔 채로, 1층에서는 토요일마다 사교파티가 벌어졌다. 니체의 추종자들은 그들의 우상이 바로 위층에 누워 있다는 사실을 의식하고 흥분했다. 특별 손님은 2층으로 올라가 먼발치에서 그를 볼 수 있었다. 인지 능력을 완전히 상실한 니체는 그런 식으로 엘리자베스의 명성을 높여주는데 이용당했다. 어머니가 죽고 난 뒤로는, 문서 보관소를 바이마르로 옮겼다. 그러던 1900년 8월 25일, 니체는 그렇게 세상을 떠났다. 장례식은 아이러니하게도 기독교식으로 치러졌다.

반유대주의자였던 엘리자베스는 니체가 죽은 지 1년 만인 1901년에, 니체의 유고를 마음대로 편집해서 『힘에의 의지』를 출간했다. 『힘에의 의지』 확장판을 내고 난 1908년에는 노벨 문학상 후보에 올랐고, 이후로도 세 번이나 니체에 대한 글로 수상 후보에 이름을 올렸다. 예나대학교는 그녀에게 명예박사 학위를 수여했다. 1933년에는 문서 보관소에서 히틀러를 맞이했고, 이때 엘리자베스는 니체의 지팡이를 히틀러에게 선물하는 영광(?)을 얻기도 했다. 니체의 글은 문서 보관소를 들락거리는 나치당원들에 의해 왜곡되었고, 히틀러는 자신의 이미지 정치에 니체의 '힘에의 의지'를 적극 이용하였다. 그러는 동안에 어느덧 90살를 앞둔 엘리자베스는 1935년에 고통 없이 평화로운 죽음을 맞이했다. 그녀의 장례식에 히틀러가 참석해서 화환을 내려놓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