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 볼프강 폰 괴테
출생 : 1749년 8월 28일, 신성 로마 제국 프랑크푸르트
사망 : 1832년 3월 22일 (향년 82세), 독일 연방 작센바이마르아이제나흐 대공국 바이마르
국적 : 신성 로마 제국 1749~1806, 라인 동맹 1806~1813, 독일 연방(작센바이마르아이제나흐 대공국) 1813~1832
직업 : 작가, 연극감독, 철학자, 도서관장, 정치인
모교 : 라이프치히 대학교, 스트라스부르 대학교
신장 : 169cm
배우자 : 크리스티아네 폰 불피우스(1806년~1816년, 사별)
자녀 : 아들 아우구스트 폰 괴테(1789년~1830년)
종교 : 개신교(루터회) → 무종교(범신론)
독일의 문학가이자 연극감독, 도서관장, 철학자이다. 한때는 작센바이마르 공국의 재상이었다. 근현대 독일의 가장 위대한 문인이자, 같은 문인들에게는 윌리엄 셰익스피어나 미겔 데 세르반테스에 버금가는 문학의 신화로 여겨진다. 살아있을 당시는 물론 현대에까지 독문학을 넘어 서양 문학을 논할 때 절대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이다.
괴테는 부유한 환경에서 자라면서 교육에 대한 열의와 열정이 높았으며 어린 괴테가 무언가 공부를 하고 싶어하면 경제적으로도 환경적으로도 충분히 그 지적 욕구를 해소시켜 줄 수 있는 기회가 잘 맞물렸다. 괴테는 라틴어 뿐만 아니라 그리스어, 프랑스어, 영어, 이탈리아어를 교육받았으며 뿐만 아니라 성서와 히브리어, 이디시어 등도 교육받았다.
아버지의 권유로 라이프치히 대학교에서 입학하여 법률학을 배웠ㄱ 22세에 변호사 사무소를 차린다. 하지만 법학보단 글 쓰길 좋아하던 괴테는 24살 때, 희곡《괴츠 폰 베를리힝엔》을 쓰며 문학에 발을 내민다.
그리고 1년 후인 1774년 25살 때, 괴테는《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을 발표한다. 발표 직후 괴테는 유럽에 유명세를 떨치는데 심지어는 나중에 "나를 언제나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 작가로만 기억한다."고 불만을 가질 정도로 엄청난 인기를 구가한다. 그가 60년에 걸쳐 완성한 필생의 대작이자 세계 문학 사상 최대 걸작 중 하나인《파우스트》[5]도《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인기만은 못 따라갈 정도였다. 30대 후반에 방문한 이탈리아에서도 괴테는《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을 쓴 작가로 유명했으며 실제로 본인이 책을 읽으며 느낀 감동을 괴테에게 열변하는 사람도 부지기수였다.
그러나 그 커다란 유명세와는 반대로 괴테는 작품 자체로는 큰 돈을 벌지 못했다. 출판 계약 당시 출판사는 별볼일 없는 신인 작가일 뿐인 괴테에게 인세를 조금 내줬고 유럽 곳곳에서는 무단으로 출판되는 사본이 마구잡이로 나왔기 때문이다. 하지만 성공의 계기가 된 것은 맞고 이 소설을 보고 감탄한 작센-바이마르 공국의 공작 카를 아우구스트가 그를 초청해 공무원으로 고용했다.
하지만 그가 공무 업무에 싫증을 느낀 것과 문학에 대한 집념을 이해한 공작은 이탈리아에서의 여행과 예술 활동에 전념할 수 있도록 계속해서 그를 후원했다. 이때 괴테의 나이는 30대 후반이었다. 괴테가 여행에서 돌아온 후에도 전처럼 친구로 여겨 늘그막까지 매우 친하게 지냈다. 괴테의 이탈리아 여행은 그에게 문학적 성장을 이루게 해준 계기가 되었고 이는 문인으로서뿐만 아니라 한 인간으로서 괴테의 인생의 커다란 전환점이 되었다. 괴테가 문학 외의 철학과 식물학, 미술 등등에 관심을 기울일 수 있었던 것도 공작의 재정적 지원이 있어 그가 생활적으로 여유를 가진 덕이다.
괴테는 어릴때도 부유한 아버지 덕에 즐겁게 공부 할 수 있었고 청년기에도 좋은 친구를 만나 돈 걱정 안하고 문학 작품 활동을 할 수 있었기에 어찌보면 운이 정말 좋은 인생이라 할 수 있겠다.
괴테는 자신의 연인을 자신의 작품에 등장하게 하는 것으로도 유명한데 그 대표자가 파우스트의 그레트헨과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의 샤를롯테 부프 (1753년 ~ 1828년)이다. 그레트헨은 괴테가 십대 때 첫 눈에 반한 첫사랑의 대상이었고, 샤를롯테는 괴테의 친구의 아내였다. (이런..)
19살에는 어머니의 친구이자 26살이나 연상인 주잔네 폰 클레텐베르크 (1723년 ~ 1774년)란 여자와 사귀었고 그보다 훨씬 뒤인 74살에는 55살 연하인 울리케 폰 레베초프 (1804년 ~ 1899년)에게 청혼하기까지 한다. 첫 결혼은 16살 연하인 크리스티아네 폰 불피우스 (1765년 ~ 1816년)와 했으며 그녀에게서 아들인 아우구스트 폰 괴테 (1789년 ~ 1830년)를 얻었다. 동거한 지 18년이나 지난 1806년에서야 혼인했고 결혼 9년만에 크리스티아네는 병사했다.
아내 사후에도 여러 여자와 사귀었지만 그중 가장 유명한 인물은 울리케 폰 레베초프라는 여성이었다. 울리케는 괴테를 만날 당시 17세였다. 사랑을 처음 느꼈을 때 괴테는 이젠 늙은이가 된 스스로를 타이르며 나무랐지만 내내 사랑을 앓다가 2년 뒤인 1823년에는 울리케에게 청혼을 하고 만다. 이런 청혼에 친구이던 카를 아우구스트 공작은 배를 다 잡고 웃으면서 "일흔 넷에 19살 여자를 사랑하다니 이건 심하다고!"라면서 놀려댔다. 하지만 괴테의 사랑은 마음에서 우러난 진심이었다. 괴테는 의사까지 찾아가[14] 이 나이에 혼인을 할 수 있냐는 진단까지 받았고 의사는 매우 건강하니 걱정할 것 없다고 답했다. 그러자 괴테를 놀리던 공작 아우구스트도 괴테의 마음이 진심이라는 걸 깨닫고 괴테의 부탁을 승낙하여 레베초프 부인을 찾아가 괴테를 소개하고 괴테가 부인의 딸을 좋아한다고 뜻을 전한다. 그러자 울리케의 어머니인 레베초프 부인는 "괴테 씨야 너무나도 유명하고 그런 분이 우리 집안과 한 집안이 되는 건 나쁘진 않지만 아무래도..."라는 식으로 곤란하단 반응을 보였다. ㅡ,.ㅡ;
괴테는 지식적으로 다재다능하여 식물학에서는 '꽃은 잎이 변한 것'이라는 업적을 남겼으며 치의학과 해부학에서는 간악골(앞니뼈)를 발견하여 업적을 남겼다고 한다. 이것은 창조론을 부정하며 진화론의 사상적 근거에도 상당한 발전의 도움이 되었다. 다만 물리학은 관심이 없었는데 거부하는 입장이었다고 한다.
당시 물리학의 대가 뉴턴이 자연을 나누어 수량화하고 법칙화 하는 것에 반해 괴테는 자연은 연속적인 것이라는 유기적 우주관을 주장했다. 사물을 극과 극 간의 조화로 설명하는 자신만의 자연 철학을 시도했다. 또한 광학에 대해서 대단한 자부심을 갖고 있었는데 빛, 그림자, 색을 탐구하며 집필한 색채론은 훗날 미술가들에게 영향을 주어 미술사의 발전에도 큰 영향을 끼치게 된다.
그는 그림에도 재능이 있었는데 평생 동안 그림 작품이 1000점이 넘을 정도로 예술에 있어서도 그의 다재다능한 면모를 보여주었다.
괴테는 만 82세까지 장수했지만 겨울을 싫어했던 괴테는 봄이 채 오기 전에 바깥 나들이를 나갔다가 날은 아직 추웠고 노쇠할대로 노쇠한 괴테의 몸은 차가운 바람을 견디지 못하고 독한 감기에 걸린다. 담당 의사는 괴테의 사인을 폐렴과 심부전이라고 기록했다. 괴테는 죽은 순간까지 요강을 끌어안고 죽었다고 알려져 있는데 마지막 숨을 거둘 때 "창문을 열어달라고 전해다오… 빛이 더 들어오게…."라고 했다고 하지만 사실은 "오줌이 마려우니. 요강 좀 가져와라."라고 했다고 한다.
그리고 괴테는 침대에 누워서 숨을 거둔 것이 아니라 침대 옆의 의자에 기댄 채 유언을 남기고 앉은채로 숨을 거두었다고 한다. 가족들이 의자에 앉은 괴테를 침대로 모시려고 했으나 그 자리에서 잠들게 해달라고 부탁하고 그대로 영원히 잠이 들게 되었다고 한다.
눈물 젖은 빵을 먹어 보지 않은 사람은, 울먹이며 다음날을 기약하면서 캄캄한 절망의 시간을 지내보지 않은 사람은, 그대 어두운 힘을 모르리. 『빌헬름 마이스터의 수업시대』 (이게 괴테의 명언이었다니.. 눈물에 젖은 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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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HI 철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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